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험 대교류 운동 (문단 편집) == 경과 == 1966년 8월 하순, 베이징의 홍위병들이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혁명의 교리를 전파했다. 이에 매일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중난하이의 당사를 찾아와 지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톈진의 학생은 베이징을 향한 100km에 달하는 여정을 도보로 떠나며 혁명가를 부르고 마오쩌둥 어록의 구절을 읽었다. 이후 8월 28일에는 각 지방에서 14만여 명에 달하는 홍위병들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마오쩌둥은 8월 31일 천안문 광장에서 홍위병을 접견했다. 그는 홍위병들에게 그들의 혁명적 경험을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휘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9월 5일, 국무원은 마오쩌둥의 의사를 받들어 홍위병에게 교통비와 숙박비를 무료로 해주기로 하고 [[임시열차|열차를 긴급 투입]]해 베이징에 가려 하는 홍위병들을 운송하게 했다. 9월 초, 전국의 홍위병들은 베이징에 와서 혁명의 교리를 배우라는 마오쩌둥의 지령에 따라 베이징으로 몰려들었다. 상하이 한 곳에서만 서른 대의 버스가 수많은 홍위병들을 한꺼번에 실어서 베이징으로 이동했고 수백만 홍위병들은 열차에 몸을 싣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전국의 학교에서 수도로 파견할 대표단을 선출했다. 대표단은 어깨에 메는 무명 가방과 알루미늄 보온병, 찻잔, 칫솔, 수건 등을 갖췄고 마오쩌둥 어록을 주머니에 넣었으며 지역 위원회의 정식 소인이 찍힌 공식 소개장을 몸에 지녔다. 이렇듯 국가의 공인을 받은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는데, 어떤 이들은 충성을 표시하기 위해 밥 공기만한 크기의 마오쩌둥 배지를 자신의 살점에 박아넣기까지 했다. 홍위병은 일종의 지위의 상징이 되었고 청년 학생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대상이 되었다. 처음 홍위병 조직의 지도자는 당·정·군 영도자녀들의 간부였다. 그들이 부모 세대에게서 구한 휘장 없는 녹색 군복을 입고, 게다가 그 시절엔 귀한 테릴렌으로 만든 붉은 완장을 차고는 위풍당당하게 홍위병 대오를 이끌었으며,“붓을 들어 칼과 창으로 삼아 마음과 힘을 합쳐 반동을 물리치자”라는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며 거리에서 시위를 할 땐 모두들 찬탄해 마지 않았다. 홍위병들은 수업을 받을 필요도, 공부를 할 필요도 없었다. 전국 어느 곳이나 가도 되었고 기차, 버스, 배 모두 공짜로 탔다. 어딜 가나 정부가 지정한 홍위병 접대소가 있었고, 먹는 것도 돈이 들지 않았다. 용돈이 필요하면 학생증이나 홍위병 증명서만 있어도 수시로 접대소에서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일로|점점 더 많은 대표단들이 기차에 오르면서]] [[입석]]이 기본일 정도로 [[가축수송(교통)|사람으로 메어터졌다.]] 심지어 다른 학생의 무릎에 앉은 학생도 있었고 좌석 등받이나 마주보는 한쌍의 좌석 중간에 설치된 작은 테이블에 앉은 학생도 있었다. 어떤 학생은 통로에 웅크리고 앉았고 어떤 학생은 짐을 올려놓는 선반에 드러누웠으며 어떤 이는 화장실에 비집고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때때로 강도가 들이닥쳐 학생들의 물품을 약탈하기도 했고 너무 많은 학생들이 탑승한데다 위생 상태가 매우 안좋아서 전염병이 창궐해 많은 학생들이 베이징에 가던 도중에 사망했다. 또한 학생들은 자리를 놓고 서로 주먹다툼을 벌였고 몇몇 사람들은 혼란을 틈타 [[무임승차]]를 감행하기도 했다. 한편 베이징은 너무 많은 학생들이 몰려오면서 이를 감당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홍위병의 방문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300만 명의 방문객이 베이징을 찾았다. 이들을 무료로 먹이고 재워야 하다보니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갔고 베이징 인근 농촌에 거주하는 농민들은 식량을 강제 징발당하는 등 심각한 고통을 겪었다. 또한 도시의 위생 환경도 매우 안좋아졌다.상하이 출신의 한 학생은 중화 전국 총공회의 베이징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사무실 바닥이 쓰레기와 딱딱하게 굳은 배설물로 뒤덮인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꼴이 무언가? 여기가 혁명의 성지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설상가상으로 베이징으로 몰려온 홍위병 사이에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전국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보인 홍위병들은 음식이나 숙소, 도난 문제로 툭하면 싸움을 벌였다. 몇몇 싸움에서는 수십명의 홍위병들이 서로에게 주먹질을 하고 허리띠를 휘둘렀다. 어떤 학생은 건물 4층에서 내던져 머리가 깨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하지만 홍위병들은 붉은 태양, [[우상화|혁명의 조타수]] 마오쩌둥을 만날 수만 있다면 이러한 곤경 따윈 개의치 않았다.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8월 18일, 8월 31일 군중 대회를 개최한 후 추가로 여섯번의 홍위병 사열식을 거행했다. 1966년 11월 26일에 열린 행사를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은 총 1200만 명의 홍위병을 사열했다. 하지만 홍위병들이 워낙 많이 와서 천안문 광장으로도 전부 다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마오쩌둥은 지붕이 없는 지프차를 타고 도시 곳곳을 돌아가면서 200만 명의 학생들을 사열했다. 사열 대회 준비는 매번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홍위병은 한밤중에 여러 무리로 나뉘어 행진하거나 6천대에 달하는 대형 트럭을 타고 광장으로 이동했다. 대회는 절대로 사전에 공지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단 한벌 뿐인 옷을 세탁해버린 학생들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그대로 입고 길을 나서야 했다. 공안 요원들은 학생들을 상대로 몸수색했는데 어떤 학생은 주석을 암살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머리핀을 압수당했다. 학생들은 지시에 따라 열을 맞추어 앉았다. 각각의 무리마다 별도로 자리가 배정되었다. 화장실을 찾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소변에 젖은 땅이 이내 질퍽거렸고 많은 학생들이 서로에게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기다린 끝에 마오쩌둥이 등장하면 학생들은 벌떡 일어나 까치발로 목을 길게 잡아뺀 채 주석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마오 주석 만세!"를 외치며 앞으로 몰려들었다.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에서는 마오쩌둥을 만나 감격한 학생들을 인터뷰한 내용이 쏟아져나왔다. >"오늘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마침내 나는 위대한 지도자 마오 주석을 만났다!" 하지만 일부는 학생들의 이같은 흥분에 함께 하지 않았다.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최초의 홍위병 사열 대회에 참가했던 왕릉펀은 외국어 학원의 독일어과에 재학했을 때 배웠던 [[아돌프 히틀러]]의 뉘른베르크 궐기대회 연설과 [[린뱌오]]의 연설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한달 뒤 그녀는 주석에게 편지를 보냈다. >"문화대혁명은 대중 운동이 아닙니다. 총을 찬 한 남자가 대중을 조종하고 있는데 어떻게 대중 운동이겠습니까?" 이 19살짜리 여학생은 곧 체포되어 13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또한 어떤 학생들은 뚱뚱한 체구에 약간은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뻣뻣하게 손을 들고 있는 남성이 혹시 대역 배우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고 광기에 휩싸인 동료들에게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으며 홍위병들의 엄청난 열기에 묻혔다. 홍위병들은 베이징 뿐만 아니라 [[성지순례|혁명의 성지로 지정된 장소들을 방문했다.]] 엔안에 홍위병의 행렬이 이어졌고 마오쩌둥과 혁명 동지들이 피난처로 이용했던 동굴 속 거주지에 수많은 학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후난성 사오산에 있는 주석의 출생지에도 역시 홍위병들이 찾아왔으며 주석이 자란 황토 벽돌집, 주석이 다녔던 학교, 주석이 젊었을 때 일광욕을 즐겼다는 오렌지 나무들로 뒤덮인 길고 좁은 형태의 오렌지 섬은 수많은 이들이 몰려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마오쩌둥이 천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국민혁명군과 맞서싸웠던 징강산에도 홍위병들이 잇달아 찾아왔다. 12월 부터 매일 6만여 명의 홍위병이 찾아왔고 한달 뒤에는 방문객이 원주민보다 서른 배나 더 많아졌다. 그 결과 징간산 일대는 초토화되었고 인민해방군 소속 헬기들이 음식과 약품 상자를 투하해야 했다. 또한 홍위병들은 [[대장정]] 팀을 조직해 홍군의 대장정 진로를 따라갔다. 그들은 홍군의 발자취를 쫓으며 선배들이 겪었던 고생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혁명의 계승자로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때로는 대열의 선두에서 걸어가는 홍위병이 대장정 팀의 이름이 적힌 홍기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작은 판자에 주석의 말씀을 적고 자신의 배낭에 부착해서 뒤따라오는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 이들도 있었다. 이렇듯 수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한곳으로 몰리는 일이 벌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전염병]]이 창궐했다. 특히 [[뇌수막염]]이 치명적이었다. 뇌와 척수를 감싸고 있는 보호막에 염증이 생기는 이 질환은 기침과 재채기를 통해 전염되었다. 1966년 8월 베이징에서 뇌수막염이 처음 발병했고 2, 3달 뒤 베이징 전역에 퍼졌다. 또한 학생들이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혁명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뇌수막염 역시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데다 학생들을 무료로 먹이고 재우느라 엄청난 재정 손실을 보고 현지 주민들이 막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부는 1966년 12월 21일 무료 숙식과 여행을 폐지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무료 여행이 폐지되었음에도 여전히 여행을 즐겼고 뇌수막염은 지속적으로 창궐해 수많은 이들을 고통에 빠뜨렸다. 대부분의 병원은 뇌수막염을 치료할 약은 고사하고 마스크도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수많은 간호사와 의사들은 마스크도 쓰지 않고 뇌수막염 환자를 치료하다가 감염되었다. 전염병 예방 및 치료를 감독해야 할 보건부는 주자파를 색출하려는 홍위병들에게 포위되어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라서 의료 시스템을 제대로 집행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중국은 미국의 의료 지원 제안을 거절하다가 1967년 2월 항생제가 너무 부족해지자 어쩔 수 없이 서유럽과 아시아의 제약 회사로부터 수백 톤의 의약품을 구입했고 뇌수막염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전국적인 임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통제 센터를 설립했다. 하지만 이때는 너무 늦어 16만 명이 넘는 이들이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1967년 2월 3일과 3월 19일, 중공 중앙은 두 차례에 걸쳐 전국 경험대교류 운동을 중단하라는 통지를 내렸고 각 지역 안내소는 속속 철거되면서 대교류 운동은 7개월 만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전히 무임승차, 무료 숙박을 감행했고, 이 여파는 1967년 말까지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